마틴 로이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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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틴 로이드 존스는 웨일스 출신의 회중교회 목사로, 40세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의사 경력을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었으며, 강해 설교 스타일로 유명했다. 그의 설교는 성경 구절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해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며, "불타는 논리"를 강조하며 성령의 역사와 논리적 설득의 조화를 추구했다. 로이드 존스는 청교도 신학에 깊이 경도되었으며, 성령 세례를 중생과는 구별되는 체험으로 강조했다. 그는 1966년 복음주의 연맹에서 자유주의와 복음주의가 혼합된 교파를 떠나 복음주의를 형성할 것을 촉구하여 논쟁을 일으켰다. 그의 저서는 한국어로 번역되어 한국 교회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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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로이드 존스 | |
---|---|
기본 정보 | |
존경하는 호칭 | 목사 |
이름 | 데이비드 마틴 로이드존스 |
원어 이름 | David Martyn Lloyd-Jon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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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웨일스 |
직업 | 기독교 목사 의사 작가 |
출생과 사망 | |
출생일 | 1899년 12월 20일 |
출생지 | 카디프, 웨일스 |
사망일 | 1981년 3월 1일 |
사망지 | 런던, 잉글랜드 |
학력 | |
모교 | 런던 대학교 |
가족 | |
종교 | |
사역 | |
교회 | 베들레헴, 샌즈필즈, 포트 탤벗 포워드 무브먼트 (칼뱅주의 감리교, 1927–1939) 웨스트민스터 채플 (회중교회, 1939–1968) |
기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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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www.mljtrust.org |
2. 생애와 사역
의사였던 마틴 로이드 존스는 40세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그는 웨일스학파의 대표적인 회중교회 목회자였다.[1]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899-1927)
마틴 로이드 존스는 1899년 12월 20일 웨일스 카디프에서 태어나 카디건셔의 랑게이토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는 식료품 상인이었고, 두 형제가 있었다. 1918년 인플루엔자 대유행 동안 형제인 해롤드가 사망했고, 다른 형제 빈센트는 고등 법원 판사가 되었다.[1] 랑게이토는 웨일스 감리교 부흥 운동과 관련이 있는데, 이곳은 다니엘 로랜드의 사역지였다. 1914년부터 1917년까지 런던 문법 학교에 다녔고, 이후 의과 대학생으로 세인트 바르톨로뮤 병원에 다녔으며, 1921년에는 왕실 의사 토마스 호더 경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다. 로이드 존스는 런던 대학교에서 의학 학위를 받았고, 영국 왕립 의학 협회 회원이 되었다.[2] 2년간 설교에 대한 소명을 느끼며 갈등한 후, 1927년 베단 필립스와 결혼하여 애버번 (포트 탈봇)의 교회에서 사역해 달라는 초대를 받아 웨일스로 돌아갔다.2. 2. 애버번에서의 목회 (1927-1938)
로이드 존스는 웨일스학파의 대표적인 회중교회 목회자였다.2. 3.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의 목회 (1939-1968)
1939년, 그는 아베라본에서 10년 동안 목회한 후, 런던으로 돌아와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부목사로 임명되어 G. 캠벨 모건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15] 그가 새 직책을 맡기 하루 전, 제2차 세계 대전이 유럽에서 발발했다. 같은 해, 그는 오늘날 대학 및 칼리지 기독교 연합으로 알려진 학생 국제 연합의 회장이 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가족과 함께 서리 주 해즐미어로 이사했다. 1943년 모건이 은퇴하면서 로이드 존스는 웨스트민스터 채플의 단독 목사가 되었다.로이드 존스는 해설 설교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그가 집전한 주일 아침 및 저녁 예배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금요일 저녁 성경 공부 역시 같은 스타일의 설교로 진행되었다.[15] 그는 성경의 한 장을 구절별로 해설하는 데 여러 달, 심지어 몇 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의 설교는 종종 50분에서 1시간 정도였으며, 런던의 대학교와 칼리지에서 많은 학생들을 끌어 모았다. 그의 설교는 매주 발행되는 ''웨스트민스터 레코드''에 (거의 ''그대로'') 기록되어 인쇄되었다.
2. 4. 은퇴 이후의 삶 (1968-1981)
1968년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의 목회를 은퇴했다. 그는 금요일 저녁 성경 공부 강해에서 로마서를 통해 설교를 계속하지 못하게 된 것은, 그가 "성령 안에서의 기쁨"에 대해 개인적으로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고 말했다. 이는 그의 다음 설교의 주제였다(로마서 14:17에 근거).[16]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자신의 설교를 편집하여 출판하고, 다른 목사들을 상담하며, 편지에 답하고, 컨퍼런스에 참석하는 데 집중했다.[16] 아마도 그의 가장 유명한 출판물은 로마서에 대한 14권의 해설 시리즈인데, 그 첫 번째 권은 1970년에 출판되었다.[16]로이드 존스는 평생을 잉글랜드에서 살면서 목회 활동을 했지만, 그의 뿌리인 웨일스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웨일스 복음주의 운동을 지원하여 조국에 대한 관심을 표현했다. 그는 영어와 웨일스어로 설교하면서, 그들의 컨퍼런스에서 정기적으로 연사로 참여했다.[16] 그의 사후, 이 운동은 그의 설교와 기사를 모아 영어와 웨일스어로 다양한 책을 출판했다.[16]
로이드 존스는 1980년 6월 8일 바콤 침례교 채플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다.[16] 평생의 사역을 마치고, 그는 1981년 3월 1일 성 다윗의 날, 이링에서 평화롭게 잠들었다.[16] 그는 웨일스 서부 카디건 근처 뉴캐슬 에믈린에 묻혔다.[16] 많은 참석자들이 참석한 감사 예배가 4월 6일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열렸다.[16]
3. 신학 사상과 특징
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에 대해 '불붙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불렀다.[9] 이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설교가 아니라, 거룩함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집중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 외의 것은 모두 목표 미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설교에서 논리의 사용을 중요하게 여겼지만, 계몽주의 시대의 논리와는 다른, '불타는 논리'를 강조했다.[9] 여기서 '불'은 성령의 활동과 능력을 의미하며, 설교는 성령의 은사를 통해 주어진 성경 구절의 진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진정한 설교는 강해 설교여야 한다고 믿었다. 즉, 설교의 주요 목적은 성경의 주요 가르침을 드러내고 확장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로이드 존스는 자유주의 기독교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강하게 반대했으며,[1] 관용주의 교회 접근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기존 교파를 떠나라고 권장했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 교제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공통된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1]
또한, 로이드 존스는 일부 개신교 교회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간증을 "종교오락"이라고 비판했다.[9] 그는 교인이라는 소비자의 요구에 맞춘 종교 서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설교가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조직신학과 교회사는 그의 설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9]
3. 1. 강해 설교
로이드 존스는 해설 설교 스타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가 집전한 주일 아침 및 저녁 예배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고, 금요일 저녁 성경 공부 역시 같은 스타일의 설교로 진행되었다.[9] 그는 성경의 한 장을 구절별로 해설하는 데 여러 달, 심지어 몇 년이 걸리기도 했다. 그의 설교는 종종 50분에서 1시간 정도였으며, 런던의 대학교와 칼리지에서 많은 학생들을 끌어 모았다. 그의 설교는 또한 매주 발행되는 ''웨스트민스터 레코드''에 (거의 ''그대로'') 기록되어 인쇄되었다.로이드 존스는 기독교에 대해 "불타는 논리"(logic on fire)라고 불렀다.[9] 이는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감상적인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과 만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열정적인 집중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는 설교에서 논리의 사용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지만, 그의 논리에 대한 관점은 계몽주의 시대의 논리와 같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그것을 "불타는 논리"라고 부른 이유이다. 불은 성령의 활동과 능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는 설교가 성령의 도움, 즉 은사를 통해 주어진 성경 구절의 진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진정한 설교는 항상 강해 설교라고 믿었다. 즉, 설교의 주요 목적은 고려 중인 성경의 주요 가르침을 드러내고 확장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주요 가르침이 드러나면, 그는 이 주제를 논리적으로 확장하여 성경의 다른 구절에서 가르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성경적 교리임을 증명하고, 듣는 사람에게 그것의 실제적인 사용과 필요성을 보여주는 데 논리를 사용했다.
3. 2. 청교도 신학의 영향
로이드 존스는 1959년부터 1978년까지 웨스트민스터 청교도 연구회(Puritan and Westminster Conferences)에서 19회 강연하였다.[1]3. 3. 성령론
로이드 존스는 성령의 부으심이 말씀 선포로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령의 불을 끄는 행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부흥운동이 성령의 기름부으심이며, 칼빈주의가 메소디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지성주의와 스콜라주의로 흐른다고 경고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신앙고백이 성경을 대체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질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열광주의, 즉 감정 조절이 안 되는 상태를 옹호하며, 이것을 칼빈주의자들이 반박한다고 주장하였다.[24]마틴 로이드 존스는 은사 운동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 이 운동과 관련된 많은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는 성령 세례를 회심 및 중생과는 별개의 경험으로 가르쳤다.[1] 그는 성령 안에서 단일 세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6] 그는 생의 말년에 청중들에게 성령의 체험을 적극적으로 구하라고 촉구했다. 1976년에 출판된 에베소서 6:10–13의 해설에서 그는 "이 불에 대해 아는 것이 있습니까? 만약 없다면, 하나님께 고백하고 인정하십시오. 회개하고, 그분께서 당신 안에 성령과 그분의 사랑을 보내주시기를 구하여, 녹고 움직여지고, 신성한 사랑으로 채워지고, 당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알고, 그분의 자녀로서 그것을 기뻐하며, 다가올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십시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고 하시고, 오히려 '성령으로 충만하라'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기뻐하라'"라고 말하였다.
로이드 존스가 기독교인에게 성령 세례의 필요성을 강조한 부분은 이것이 기독교인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압도적인 확신을 제공하고, 그럼으로써 불신 세상에 그리스도를 담대하게 증거할 수 있게 해준다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6]
로이드 존스는 중단주의에 반대하며, 그 교리가 성경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동 설립한 출판사인 배너 오브 트루스 트러스트에게 이 주제에 관한 자신의 저작을 사후에 출판해 달라고 요청했다.[6] 로이드 존스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역의 필요성과, 기독교 설교자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에 적대적인 현대 세계에서 설득력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실 필요성을 계속해서 선포했다.[7]
마틴 로이드 존스는 오늘날 기독교계의 많은 교파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오순절교회와의 교류에 대한 논의가 있지만, 오순절교회의 지도자들 중 많은 수가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성령에 의한 회심, 거듭남과는 별개의 체험으로서, 성령 세례를 가르쳤다[17]. 그리고 특히 만년에 성령을 구하도록 촉구했다. 1976년에 출판된 에베소서 강해 6:10-13에서 "당신은 이 불을 알고 있는가? 모른다면 하나님께 고백하십시오. 회개하고, 성령을 보내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하며, 주님의 사랑에 녹아 감동하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뻐하며, 장차 올 영광의 소망을 기대하십시오.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18]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주 예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19]라고 말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가 강조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성령 세례를 필요로 하며,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압도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을 주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에 대한,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능력을 준다는 것이다.[17]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성령 세례를, 성령에 의한 거듭남, 성화와 구별하고 있다. 또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하여 워필드 등의 종말론에 반대했다[17]. 그는 참된 하나님과 기독교에 적대적인 세상이 귀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오순절 날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있는 역사를 설교자(와 증인)가 필요하다고, 계속 선언했다.[20]
오야마 레이니 목사는, 복음주의와 오순절교회 사이에 있는 오해를 풀기 위한 중요한 책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의 『영광에 넘치는 기쁨』을 꼽았다.[21][22]
일본의 복음주의에서도, 마틴 로이드 존스가 가르친 성령 세례를 지지하는 신도가 나오고 있다.[23]
3. 4. 교회론
로이드 존스는 자유주의 기독교에 강하게 반대하며, 이를 이단으로 간주했다.[1] 그는 관용주의 교회 접근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고,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에게 기존 교파를 떠나라고 권장했다. 그는 진정한 기독교 교제는 믿음의 본질에 대한 공통된 신념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1]1966년 복음주의 연합이 조직한 복음주의자 전국 총회에서 로이드 존스는 "구원의 본질적인 문제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사람들과 연합한 교단"에서 복음주의자들이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큰 논쟁을 일으켰다.[1] 이는 주로 잉글랜드 교회 내의 복음주의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지만, 자유주의적 분파가 있는 다른 교단들도 있었기에 그의 의도였는지에 대한 이견이 있다. 그는 "복음주의 교회의 교제 또는 연합"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가 제안하는 새로운 교회론이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이견도 있었다.[2]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잉글랜드 교회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인 존 스토트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스토트는 연설 예정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의장 자격으로 로이드 존스에게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그의 의견이 역사와 성경의 모범에 어긋난다고 밝혔다.[2] 이러한 공개적인 충돌은 기독교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고,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이후 킬 대학교에서 열린 전국 복음주의 성공회 회의에서 스토트의 영향으로 복음주의 성공회 신자들은 로이드 존스가 제안한 분리주의적 접근 방식을 거부하고, 잉글랜드 교회에 전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의했다.[4]
3. 5. "종교오락"에 대한 비판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일부 개신교 교회에서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간증을 "종교오락"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교인이라는 소비자의 요구에 맞춘 종교 서비스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의 본질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9]로이드 존스는 텔레비전 설교에도 부정적이었다. 그는 시간 제약이 있는 "통제된" 설교는 "성령의 자유를 해친다"고 보았다. 즉, 설교자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설교 시간을 자유롭게 조절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텔레비전 설교 요청에 "만약 성령이 갑자기 설교자에게 임하여 그를 사로잡는다면, 당신의 프로그램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반문했다고 한다.[9]
3. 6. 신학에 대한 존중
로이드 존스는 설교가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설교자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학문인 신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통해, 그는 설교를 잘하는 기술을 배우거나, 교인들에게 교회 생활과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라고 가르치는 현대 교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했다. 특히 조직신학과 교회사는 그의 설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9]4.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
마틴 로이드 존스의 사상과 가르침은 한국 교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저서인 《목사와 설교》, 《로마서 강해》, 《영적 침체》 등은 한국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다. 그의 강해 설교 방식은 한국 목회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복음주의 신학과 청교도 신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도 기여했다.
특히 로이드 존스의 성령론은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성령에 의한 회심, 거듭남과는 별개의 체험으로서 성령 세례를 강조했다.[17] 그는 그리스도인에게 성령 세례가 필요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세상에 대한 증인으로서 능력을 얻게 된다고 가르쳤다.[17] 1976년에 출판된 에베소서 강해 6:10-13에서 그는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며, 성령 충만을 통해 주 예수 안에서 기뻐하라고 촉구했다.[18][19]
로이드 존스는 성령 세례를 성령에 의한 거듭남, 성화와 구별했으며, 워필드 등의 종말론에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고 반대했다.[17] 그는 참된 하나님과 기독교에 적대적인 세상이 귀 기울이도록 하기 위해, 오순절 날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 있는 역사가 설교자와 증인에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20]
5. 저서
6. 비판과 논란
로이드 존스는 1966년 복음주의 연합이 조직한 복음주의자 전국 총회에서 "구원의 본질적인 문제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사람들과 연합한 교단"에서 복음주의자들이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주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1] 이는 주로 잉글랜드 교회 내의 복음주의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지만, 자유주의적 분파가 있는 다른 교단들도 있었기에 그의 의도였는지에 대한 이견이 있다. 그는 "복음주의 교회의 교제 또는 연합"에 대해 언급했지만, 그가 제안하는 새로운 교회론이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이견도 있었다.[2]
그러나 로이드 존스는 잉글랜드 교회의 대표적인 복음주의자인 존 스토트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스토트는 연설 예정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의장 자격으로 로이드 존스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그의 의견이 역사와 성경의 모범에 어긋난다고 밝혔다.[2] 영국 복음주의의 두 원로 간의 이러한 공개적인 충돌은 기독교 언론에 널리 보도되었고 상당한 논란을 일으켰다. 스토트는 나중에 의장으로서의 지위를 남용한 것에 대해 로이드 존스에게 사과했으며, 로이드 존스의 저서를 매우 존경하여 자신의 저서에서 자주 인용했다.[3]
이견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이듬해에는 킬 대학교에서 제1회 전국 복음주의 성공회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스토트의 영향으로 복음주의 성공회 신자들은 로이드 존스가 제안한 분리주의적 접근 방식을 거부하고 잉글랜드 교회에 전적으로 참여하기로 결의했다.[4]
이 두 회의는 사실상 영국 복음주의 공동체의 상당 부분을 이끄는 방향을 결정했다. 로이드 존스의 견해의 정확한 본질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그의 견해는 의심할 여지 없이 두 그룹이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이러한 입장과 그로 인한 분열은 적어도 1996년까지는 대체로 변함없이 지속되었다.[5]
1966년에 로이드 존스는 복음주의 연맹의 회의에서 모든 복음적인 목사들에게 자유주의와 복음주의가 혼합된 교파(특히 잉글랜드 성공회)를 떠나 복음주의를 형성할 것을 촉구했다. 이 때문에 기독교계 출판물에서 논쟁이 일어났다. 성공회 내 복음주의 지도자 존 스토트는 이에 반대했고, 스토트 등은 성공회에 잔류하게 되었다. 이때 이탈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2009년에 자유주의적인 캐나다 성공회와 미국 성공회에서 분리되어 북미 성공회가 형성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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